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하다.


'더 퍼시픽'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의 세 번째 2차 세계대전 소재의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던 태평양 전선을 배경으로 한다. 미군들 입장에서 그나마 같은 문화권인지라 자신들과 비슷한 상식을 갖고 있던 독일군과는 달리, 일본군은 처음 보는 지독한 별종 그 자체였다. 일본군은 총알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대검을 뽑아 들고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하고, 부상병으로 위장해 있다가 긴장을 푼 미군들이 다가가면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는 등 상식 밖의 기행을 일삼는다. 불쾌한 습기가 감돌고 찌는 듯한 더위의 정글에서 이른바 '반자이 어택'으로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일본군 때문에 미군들은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태평양 전선이 배경인 '더 퍼시픽'은 유럽 전선이 배경이었던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묘사한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영웅들의 낭만적 서사가 주된 테마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전쟁 그 자체의 처절한 참상에 집중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들의 적은 일본군 뿐만이 아니었다.


이전 작품들을 보았다면 알 수 있듯이, 유럽 전선에서 대부분의 전투는 유럽 특유의 드넓은 초원과 숲,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시가지를 배경으로 한다. 물론 바스토뉴 같이 극한의 추위로 병사들을 괴롭혔던 곳도 있지만 유럽 전선에 파병된 병사들은 보통은 축복받은 유럽의 기후를 누릴 수 있어서 그나마 사정 나았다. 그러나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군들은, 난생처음 겪는 기후에 적응을 못해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인에게는 친절하지 않는 정글과 늪, 동굴과 같은 가혹한 환경은 그 자체만으로 미군들의 멘탈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런 곳에서 또 난데없이 일본군이 튀어나와 대검을 휘둘러대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한에 달했을 것이다. 때문에 해당 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도 시종일관 암울하고 답답한 분위기가 지속된다.
또 이러한 지옥도를 배경으로 했기에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나 전우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병사들의 현실적인 인간상.


주인공 중 한 명인 유진 슬레지와 그의 전우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유진 슬레지는 자신의 고향 친구들과 같이 군에 입대해 참전하길 원했지만, 유전병을 앓고 있어 부모님의 반대를 산다. 그러나 결국 고집을 부려 군입대에 성공해 태평양 전선으로 파병되고, 그 지옥도 속에서 이내 전쟁의 참상과 마주하게 되어 점차 정신이 황폐화되어 간다. 그의 상사이자 극의 후반부에 단짝 전우조가 될 스내푸는 그 특유의 직설적이고 냉소적인 언행으로 가뜩이나 약해져 가는 유진 슬레지의 정신 상태를 더욱더 뒤흔들어 놓는다. 마치 서로 한 없이 친한 친구 같았던 이전 작품의 주인공들과 달리, 유진 슬레지와 스내푸는 서로 의지하면서도 시종일관 서로를 비꼬고 비하하는, 애증의 관계를 유지한다. 자신들에게는 이질적인 환경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서로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마냥 친절하게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결점의 영웅 같았던 전작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의 숨기고 싶은 인간적인 모습 또한 여과 없이 묘사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로버트 레키는 계속되는 전투 스트레스로 인해 요실금 증세를 보이기까지 한다. 침대에 누워 말없이 오줌을 흘리는 로버트 레키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그의 동료의 눈빛은 해당 장면의 백미이다. 유진 슬레지와 함께 들어왔던 빌 레이든은 신참 시절 유진 슬레지와 함께 선임들의 텃세에 시달리지만, 이내 적응하여 본인도 역시 이후 들어오는 신병들을 신나게 괴롭힌다. 계속되는 빌 레이든의 괴롭힘에 멘탈이 붕괴된 한 신병은 한밤 중에 일본군 진지를 향해 총을 쏴대어 아군들의 위치를 일본군에게 노출시키는 실수를 한다. 유진 슬레지가 처음 왔을 때 선임으로서 거들먹거리며 막사에 대해 설명해주던 제이 들로는, 이후 지속되는 전투로 인해 PTSD 증상에 시달리고, 용변을 보다가 튀어나온 일본군을 피해 하의를 벗은 채로 아군들에게 뛰어가며 도움을 청한다. 결국 아군 중 한 명이 제이 들로를 노리던 일본군을 처치하게 되고, 한 시름 놓은 부대원들은 추태를 보인 제이 들로를 고약하게 놀려 준다.

이렇듯 주인공들의 현실적이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묘사는 작품의 분위기와 더불어 시청자들에게 전쟁의 실상과 참혹함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성은 여전하지만, 이전 작품들에는 못 미치는 흥행 성적.


미국인들에게 2차 세계 대전은 아무래도 태평양 전선보다는 유럽 전선이, 히로히토 보다는 아돌프 히틀러가 더 유명하다. 유럽 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 태평양 전선을 배경으로 삼은 탓에, 이전 작품들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더 낫다고도 볼 수 있는 뛰어난 작품성을 갖고 있음에도 흥행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저조한 흥행에는 여과 없는 참혹한 장면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점도 한몫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작품성만큼은 인정받아 TV 프로그램계의 오스카 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에미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사실 매력적이지 않은 소재라는 것은 미국인들의 입장이고, 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일제에게 침략당했던 역사가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오히려 이전 작품들보다 더 크게 와닿을 수도 있다. 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이 드라마를 필견 해야 한다.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