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 이와이 슌지'의 대표작
200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면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러브레터'의 이름값에서 알 수 있듯 감독인 이와이 슌지는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으로, '러브레터'와 같은 밝은 분위기의 작품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도 다수 찍은 것으로 유명하다. '러브레터'가 밝은 분위기인 '화이트 이와이 슌지'의 대표 격 작품이라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어두운 분위기인 '블랙 이와이 슌지'의 대표 격 작품이다. '러브레터'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광을 이용한 뛰어나고 풍부한 영상미는 그대로지만, '러브레터'와는 다르게 한 없이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감성이 주를 이룬다.
유소년기의 미성숙한 영혼 간의 은은하지만 한 없이 잔인한 충돌.
주인공들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소녀들이다. 너무나 섬세하고, 연약하고, 삶에 대한 경험이 적다. 그래서 쉽게 상처 받고, 쉽게 절망하며, 쉽게 극단으로 빠진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이고 답답한 현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떤 아이는 하루 종일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들으며 그러한 현실을 도피하고, 어떤 아이는 내면 속 갈 곳 잃은 분노를 타인에게 잔인한 상처를 주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그 표적이 되었던 어떤 아이는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다 극단적인 선택에 까지 이른다.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처할 수는 없었을까?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는 없었을까? 모든 것이 처음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기에, 이 미성숙한 영혼들은 그저 자신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사춘기를 지나온 이라면 누구든 느껴보았을 만한 그 우울하고 답답한 감정을, 이 영화에서는 특유의 아름다운 영상미를 이용해 묘사해 내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주인공들과 같은 나이였던 그 시절, 그 감정을 다시금 꺼내 보게 만든다. 지금의 자신들을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바로 그 감정들 말이다.
2000년 밀레니엄 감성의 참신한 시도.
이 영화에는 그 특유의 일본적인 아름다운 영상미 말고도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독특한 연출이 있는데, 바로 극의 중간중간 나오는 주인공들이 릴리 슈슈의 팬 페이지에 투고하는 듯 한 몽상적인 느낌의 메시지들이다.
감독은 영화 촬영에 앞서 영화 속 가상의 아티스트인 릴리 슈슈에 관한 홈페이지를 만들고, 릴리 슈슈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아티스트인 것처럼 그녀에 관한 글을 작성하여 올린다. 이윽고 이 홈페이지는 당시의 일본 인터넷 유저들의 이목을 끌게 되고 감독 뿐만아니라 다른 유저들 역시 그에 동조하며 릴리 슈슈에 대한 글을 자신들 나름의 상상력을 첨가해 작성하여 투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인 여러 글들을 모아 감독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소설로 출간하였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영화화할 때는 홈페이지에 실제 투고되었던 일반 유저들의 댓글들을 그대로 차용하여 마치 주인공들이 작성하는 댓글들인 마냥 연출해낸 것이다. 아직 SNS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 시대를 감안하면 대단히 참신하고 실험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또 아직 인터넷 문화가 지금과 같지 않던 때라 오히려 더 현실화할 수 있었던 시도라 볼 수도 있겠다. 감독이 만들었던 릴리 슈슈의 홈페이지는 아직도 접속해 볼 수 있다.
감독한 영화 중 하나만 꼽는다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선택하고 싶다.
이러한 참신한 시도와 영화 자체의 뛰어난 작품성으로 팬들은 물론 감독 본인에게도 가장 사랑 받는 작품이다. 실제로 감독은 자신의 영화 중 하나만 꼽는다면 바로 이 작품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선택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작품의 아름다운 영상미와 연출 방식은 후에 많은 다른 작품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미국이나 영국 등지의 하이틴 드라마를 볼 때면 종종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일부 차용한 듯 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문화권이 달라서 정서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사춘기 때 느끼는 그 감정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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