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옥도가 펼쳐진 전쟁.
흔히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면 악의 제국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유럽을 정의로운 미군들이 쳐들어가 오마하 해변에 상륙해 유럽 내 해방시켜주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야말로 전 세계의 운명을 바꿨다 해도 과언이 아닌 또 하나의 중요한 전쟁이 있다. 바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이 치른 독소전쟁이다. 1941년 독일이 소련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멋대로 파기하고 그 유명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펼치며 시작된 독소전쟁은 역으로 소련이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쳐들어가 국회의사당에 깃발을 꽂는 1945년까지 약 4년 간 벌어졌다. 이 극과 극인 두 국가 간의 전쟁은 각자 국가의 명운과 국민들의 생존 문제를 건 대규모 총력전이었고 승패를 떠나 두 국가는 서로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낳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에게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의 고향땅을 지켜내고, 역으로 적의 심장부 까지 쳐들어가 항복을 받아낸 자랑스러운 역사인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소련이 해체된 지금에도 때가 되면 '전승절'이라 불리는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군대 사열 퍼레이드를 전개하며 기념한다. 2차 세계 대전에서의 미군들의 활약은 각종 미국 미디어 매체로 잘 알려져 있지만, 독소전쟁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무래도 소프트 파워 최강국으로서 전 세계 각국에 막강한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는 미국과 최대 라이벌 관계인 러시아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러시아인이 아닌 제3국의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미디어로 접할 기회가 없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특이하게도 미국의 영화 배급사인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영화로, 독소전쟁 관련 콘텐츠 부족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준다.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라 그런지 소련인이든 독일인이든 할 것 없이 전부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인상 깊다.
실제 소련군의 전설적인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다.
주드 로가 연기한 바실리 자이체프는 공식적으로 225명의 독일군 장교와 저격수를 저격한 기록을 갖고 있는 저격수 계의 전설이다. 징집되기 전에는 사냥꾼 생활을 했던 바실리는 저격수로서 징집된 후에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어마어마한 전공을 올리고 전쟁영웅으로서 크게 선전되며 소련군들의 사기를 고취하는데 혁혁한 역할을 했다. 영화에서 바실리 자이체프와 저격 대결을 펼치는 쾨니히 소령은 실제 바실리 자이체프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독일군 저격수를 모티브로 하였다. 이야기는 바실리와 쾨니히 소령 각자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바실리는 다른 수많은 소련 젊은이와 함께 열차 화물칸에 실려 독일군이 한창 공세를 펼치고 있었던 스탈린그라드로 보내진다. 그리고 바실리는 총 한 자루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다른 전우들과 함께 전장으로 떠밀린다. 앞으로 전진하면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와 맞딱들이게 되고, 후퇴하면 이번엔 아군 독전대가 전진을 강요하며 총알을 퍼붓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주변의 아군들은 앞뒤로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쓰러지고, 바실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수 없이 쌓인 전우들의 시체 더미 속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그러다 자신과 똑같이 시체 더미 속에 숨어있던 소련군 정치장교 다닐로프와 조우하게 되고, 다닐로프의 소총을 빌려 자신의 천부적인 사격 실력을 활용해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수라장에서 빠져나온 후 다닐로프는 상관에게 바실리의 귀신과 같은 사격 실력에 대해 보고 하고 바실리의 활약상을 널리 선전에 소련군의 사기를 돋우는 데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후 전투에서도 많은 공을 세운 바실리는 다닐로프의 선전 덕에 삽시간에 소련군의 전쟁 영웅으로서 유명해진다. 바실리의 명성은 적군인 독일군 내에서도 퍼지게 되고,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독일군 측에서도 바실리를 처치할 뛰어난 베테랑 저격수 쾨니히 소령을 초빙한다. 독일군 상부에서는 쾨니히 소령 역시 바실리에게 당하고 바실리가 더욱더 유명해질 것을 우려해 이를 만류했지만, 독일군 저격 학교의 교장이었던 쾨니히는 군인으로서의 임무보다는 바실리에 의해 희생된 자신의 학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바실리를 잡는 것이라며 상부의 만류를 뿌리 친다. 지옥도와 같은 스탈린 그라드 시가지에서, 바실리와 쾨니히는 한 사람의 저격수로서 맞대결을 펼치게 된다.
예상보다 저조한 흥행 성적과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서 비롯된 이야깃거리.
영화로서는 꽤나 잘 만든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개봉 당시 흥행 실적은 좋지 못했다. 일단 주요 관객들인 미국인들로서는 자신의 라이벌 국가인 러시아의 전쟁영웅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큰 매력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소련군이 주인공이다 보니 라이벌 국가인 러시아의 역사를 미화한다는 오해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내용과 정반대 되는 억측으로서 영화에서는 오히려 당시 소련의 체제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조국을 지킨다는 명분 하에 젊은이들을 무작정 끝도 없이 희생시키는 초반부 우라 돌격 장면이나 개전 전에 독일에 저격 관련 유학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독일의 스파이로 몰려 고문을 당했다는 바실리의 선임 저격수의 일화 등 은연중에 소련에 대해 부정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미화가 된 것은 미남 배우인 주드 로가 연기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실존 인물보다 미화가 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인 바실리 자이체프의 외모 밖에 없다.
때문에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련이나 그 위성국가들과 좋지 않은 역사가 있는 한국인들 역시도 그러한 염려는 접어두고 무리 없이 감상할 수 있다. 그간 미군이나 일본군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2차 세계 대전 작품과 다른 새로운 소재를 다룬 작품을 찾고 있다면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그에 걸맞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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